[박명기의 밑줄긋기 5] 뉴욕은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었다

박명기 기자
  • 입력 2018.10.24 11:41
  • 수정 2019.04.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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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무진장한 공간,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迷宮)이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 1유리의 도시

Ⓒ박명기
Ⓒ박명기

나는 언제나 뉴욕을 사랑했다. 누가 나에게 ‘1년만 살고 싶은 곳이 있다면’이라고 물어온다면 주저 없이 ‘뉴욕’을 댈 것이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때문에 선망의 섬이 된 크레타,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 앞에서 기념품 팔고 싶다고 설레발 떨게 한 멕시코, 스스로 점 하나가 되어 내 안의 길처럼 걷고 싶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도 0순위에 오르곤 하지만 1등의 순위가 달라지지 않았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나에게 뉴욕은 그저 미국의 도시가 아니다. 뉴욕 그 자체가 나라이고 정부다. 200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뉴욕, 브로드웨이와 센트럴파크에서 느낀 전율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The New York Trilogy> 한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이 문장의 느낌을 음미하면서 걸었다.

아무리 멀리까지 걸어도, 근처에 있는 구역과 거리들을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 그 도시는 언제나 그에게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대부’ ‘택시 드라이버’ 등 나만의 불멸의 소설-영화 리스트에는 뉴욕이 배경인 것이 꽤 많았다. ‘아이 러브 뉴욕’은 섹시한 관광홍보 문구였다. 책갈피와 스크린 속의 뉴욕은 나를 이방인이나 우주인처럼 만들어버렸다. 마치 그 도시에 잠입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실제 센트럴파크에서 폴 오스터 소설 <달의 궁전 Moon palace> 속 장면과 조우하면서 꽤 흥분하기도 했다. 월남전-반전 시위-달의 착륙-케네디 암살 등 소설 배경이 자동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 주인공처럼 센트럴파크 공원 벤치에 노숙자처럼 누워보기까지 했다. 그는 군대 징집장이 발송되었지만 이를 모른 채로 공원 벤치를 잠자리를 선택한 노숙자 대학생이었다, 그는 월남전 반전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 센트럴파크. 그날 일행은 누구도 나의 엉뚱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알 턱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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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매년 한 번씩 책장을 펼쳐봐야 직성이 풀리는 소설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나 마리오 푸조의 <대부>(영화도 자주 보지만, 나는 소설 ‘대부’가 더 탁월한 작품이라고 믿는다)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질리지 않고 꾸준히 되새김질하는 소설 <뉴욕 3부작>이 있다.

악기 연주에 불편해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렸다는 조르바의 회상은 섬뜩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참이다’라는 ‘대부’ 돈 코를레오네의 말과 이어진 장면에서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대부는 할리우드 ‘큰 손’ 잭 월츠가 애지중지 아끼는 60만 달러 최고급 애마의 목을 통째로 잘라버렸다. 단지 양자의 영화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는 이유였다.

폴 오스터의 소설 무대는 대부분 뉴욕이다. <달의 궁전>의 무대는 뉴욕 센트럴파크다. 단편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뉴욕 한 담배 가게가 배경이다.

‘뉴욕타임스’ 청탁을 받고 쓴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그가 각색하고 웨인 왕이 감독을 맡아 영화 ‘스모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인공의 직업은 작가였다. 그는 뉴욕 한 담배 가게에서 우연히 직원의 사진 앨범을 보게 된다. 그 앨범에서 죽은 아내를 만난다.

그것도 가게 앞 모퉁이에서 걷고 있는 아내였다. 그녀는 이 거리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이 사진은 매일 한 장소에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사연 많은 흑인 직원의 사진기가 포착했다. 이처럼 폴 오스터는 기이한 인연을 풀어내는 ‘우연의 미학’ 달인이다. 누구보다 그의 소설에는 뉴욕의 내면 풍경이 담겼다.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었다(뉴욕 3부작의 첫 문장) 평소 사랑한 뉴욕을 더 사랑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뉴욕 3부작>이었다. 추리소설(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추리소설의 탄생과정을 다루는 특이한 소재다) 형식과 소설가인 주인공이 전화로 탐정의 일을 의뢰받고 미행과 조사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소설의 모티브는 탐정 사무소를 찾는 두 통의 전화이다. 작가가 실제로 겪은 것에서 출발했다. 이 소설에도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처럼 이미 죽은 아내가 나온다. 또한 <달의 궁전>처럼 달에 착륙한 1969년이 등장한다. 소설은 작가의 소설 속 주인공을 불러내고 뉴욕 시내를 끝없이 걷는다.

1985년 출간된 1부 ‘유리의 도시(1981~1982)’는 뉴욕의 17개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했다. 출판은 정작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왔다. ‘유리의 도시’는 ‘유령들’ ‘잠겨있는 방’을 한 권으로 묶어 <뉴욕 3부작>으로 다시 출간되어 프랑스에서 문화상을 받았다.

소설 속의 뉴욕 거리는 ‘사실은 어디를 찾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향하는 곳이다. 그렇게 폴 오스터는 비록 한글판이지만 미국 작가 중 모든 작품을 직접 사서 읽고 읽은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일본 작가로는 하루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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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드라이버 스틸 샷
영화 택시드라이버 스틸 샷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과 비교할 만한 뉴욕 소재 영화도 있다. 그 중 로버트 드 니로의 젊은 시절 열연이 돋보이는 ‘택시 드라이버(1976)’가 가장 강렬하다.

12시간을 일을 해도 잠이 안 온다

제길, 지루한 날의 연속이다

내 인생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

평생을 내 안에서만 갇혀 보낼 순 없다

남들처럼 똑같이 살아야 한다

--영화 ‘택시드라이버’ 주인공 트레비스의 독백

월남전은 세계 최대 도시 뉴욕의 젊은이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폴 오스터 <달의 궁전>의 반전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과는 다른 모습도 있다. 베트남 참전 이후 명예제대 이후 불면증에 시달리며 택시 드라이버를 하고 있는 26세의 젊은이 이야기다.

평소 나는 평론가들의 말을 다 믿는 편이 아니다. 지적인 허영이 가득차고 객관을 가장한 자기자랑뿐이라서 불신한다. 하지만 ‘택시 드라이버’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영화’라는 진단은 일면 수긍된다.

주인공 트레비스의 독백은 형이상학적이면서 실제 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의 표현들이다. 그에게 닥친 잠 못 드는 시간 ‘불면증’은 케네디 암살 사건, 베트남 전쟁 패배 등 극심한 가치 혼란의 메타포(은유)다.

관객을 놀라게 하는 첫 데이트 장소도 그렇다. 하필 첫 데이트를 포르노영화관에서 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어쩌면 <달의 궁전>의 주인공도 ‘택시 드라이버’ 주인공도 모두 구세주를 원했을까. 그러면서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춘들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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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되기 이전, 혹은 되고 나서도 제 분수를 모르고 과대망상을 갖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 족속 중 하나였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시를 쓰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소설에 빠져 작가가 되고 싶다고 설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났다. 고등학교 시절 <죄와 벌>을 읽었지만 전당포 노파의 죽음 이외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나는 어렸고, 소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좀 달랐다. 지방 지주이며 패륜적인 아버지인 표도르 카라마조프, 그리고 그의 네 아들인 다혈질 연애지상주의자 드미트리, 허무주의적 무신론자 이반, 기독교 가치관을 가진 성직자 알렉세이, 이반보다 나이가 몇 달 정도 더 많은 사생아 스메르자코프. 이들 형제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군인과 교육자, 성직자 등 형제들은 러시아혁명 격랑 속에서 서로 갈라지고 싸우면서 ‘황제(차르) 살해’를 꿈꾸는 젊은이들이었다. 1980년대 군사정부 하에서 최루탄을 맡으며 눈물을 흘렸던 젊은이들이 수없이 던진 질문을 연상시켜주었다. 글쟁이에 대한 욕망과 결핍, 아버지가 없는 장남의 삶, 안개 같은 미래 등등.

이 소설은 나에게 큰 좌절을 주었다. ‘문호’의 반열에 오른 이 위대한 작가의 문장과 표현, 사상의 깊이를 읽으면서 큰 절망을 맛봤다. ‘만약 작가가 저런 사람이라면 나는 작가가 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읽는 즐거움보다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때 나는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문장이나 단어에 걸려 넘어질 나이였다. 절망이 엄습했다.

‘혹여 내 길이었을까’라고 조바심 내며 종종걸음 다가가던 작가의 길도 끝이 났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이건 나의 길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조급증에 빠진 작가 지망생에게 멀고 갈 수 없는 거대한 큰 산이었다. 그때 그나마 절망의 늪에서 건져낸 것이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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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watch?v=vzlnljD6nKw) 캡쳐
유튜브(watch?v=vzlnljD6nKw) 캡쳐

<뉴욕 3부작>에는 센트럴 파크를 비롯해 ‘꼭 가고 싶은’ 장소들이 수두룩하다. 주인공은 리버사이드 공원 가장자리 84번가 쪽으로 돌출한 마운트 톰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애드가 앨런 포는 1843년 여름에 허드슨 강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라는 문장에 흥분했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이곳에는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미국 국방부 펜타콘 자살테러 사건의 흔적이 있다. 아픔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뉴욕 ‘메모리얼 파크’에 있는 그라운드제로, 대재앙의 현장이다.

사건 10년이 되었을 때 기념관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폐허 그대로 남겨진 상태였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다른 마천루를 올랐지만 직접 가지 못했다. 마치 내 마음은 테러 여객기 공격으로 뻥 뚫려버린 쌍둥이 빌딩처럼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메워지지 않았다.

나는 테러로 참혹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소설에서 읽은 이 문장처럼 말이다. “나로 말하자면 즐거운 날도 있었고, 힘든 날들도 있었다. 힘든 날이 오면 즐거웠던 날들을 생각하지. 기억이란 위대한 축복이란다. 피터.”

폴 오스터는 ‘아이들이란 위대한 축복’이라고 썼다. 어쩌면 이 소설은 뉴욕 미궁의 이야기가 아닌 어쩌면 후세를 위한 뉴욕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뉴욕은 여전히 들어가면 헤매고 길을 잃고 마는 미궁의 도시다. 내 명함의 영문명은 폴(paul)이고 메일 계정 중 하나의 아이디는 폴 오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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