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의 밑줄긋기 31] 지리산, 가장 아플 때 와라

박명기 기자
  • 입력 2019.04.22 08:00
  • 수정 2019.04.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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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어머니다. 견디고 견디다 더는 못 견디게 아프고 힘들 때 찾아가는 어머니산이다.”

-이종성 <지리산, 가장 아플 때 와라>에서

뱀사골 계곡에 피어있는 벚꽃. 사진=박명기

지리산의 둘레길 로드에세이를 쓴 시인이 있다. 바로 이종성 시인이다. 그는 “마흔 중턱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몹시 그리워졌다. 그 품에 안겨 울고 싶을 때 나는 지리산에 간다!”라고 썼다.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이랑 구례 화엄사를 통해 노고단에 올랐다. 신혼 시절 아내랑 지리산을 종주했다. 올봄 산벚꽃이 허벅지게 피어난 날, 지리산에 갔다. 고등학교 동창들이랑 뱀사골 계곡에서 노닐고 오니 꽃몸살을 앓았다.

■ 지리산은 품이 넓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다. 지리산은 품이 넓다. 골이 깊고 산세 또한 웅숭깊다.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다. 전란과 전쟁, 재해나 가난 등 언제나 모두를 품어주어 ‘어머니의 산’으로 통한다.

골마다 전설과 구담으로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 쉰다. 아내와 신혼 시절 둘이 지리산을 종주한 적이 있다. 중산리 계곡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해 동이 뜰 때 천왕봉에 올랐다.

이종성 둘레길 로드에세이 <지리산, 가장 아플 때 와라> 사진=박명기

세석평전 산장에서 자고 연하천 산장을 거쳐 노고단까지 원추리 군락을 벗을 삼아 걸었다. 아내는 대학 동기동창이었다. ‘강한 남자’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다. 딱 한 시간도 안 되어 지리산 상남자 코스프레는 끝이었다.

내 마음도 모르고 저 멀리 동양화 같은, 지리산 계곡과 산등성이에는 미소가 퍼져나갔다. 어느새 사라진 꿈과 애써 복원하고 싶은 시절들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누구와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악몽이거나 판타지 둘 중의 하다. 아내와의 종주는 황홀했다. 그렇게 지리산은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늘 변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곳에 그대로 있다.

■ 백두대간 종착역이자 시발점, 지리산을 둘러가는 '지리산둘레길'

‘지리산둘레길’ 285km 22코스에는 숱한 스토리가 쏟아진다. 수많은 꽃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생명 사상으로 유명한 실상사의 도법 스님이 2007년부터 5년간 이 길을 직접 걸어서 조성했다.

지리산은 전남, 전북, 경남 3개도와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까지 5개 시군을 포함해 16개 읍면, 80개 마을을 품는다.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국립공원이다.

길은 백두대간 종착역이자 시발점인 지리산을 둘러간다. 마을과 마을, 길과 길, 강과 숲, 강변길과 옛길이 만나는 길이다. 이 길에서는 느림의 미학을 배운다. 산책자의 꿈을 느낀다. 도보여행자는 명상과 사색, 도란도란 꿈꾸는 마을을 시나브로 지나간다.

뱀사골 신선길 탐방로 입구. 사진=박명기

날이 저물면 이장님을 찾아 잠을 청한다. 이 길은 뇌를 공회전하며 영감을 준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걷는다. 그러니까 수평으로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때로 멍 때리기만으로 충분하다.

둘레길 손님들은 이 길에서 빛과 색깔에 절로 일어나는 감정의 교차, 한 발 한 발, 한 생 한 생 성숙과 완성을 만들어낸다. 어떤 때는 스스로 그림 속으로 사라진다.

■ 아름다운 계곡 뱀사골, 봄날은 간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례읍내 전경. 사진=박명기

그들은 한때 검은 교복과 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청운의 뜻을 꿈을 꾸었던 까까머리 소년들이었다. 그들과 봄 소풍으로 지리산 뱀사골을 찾았다. 이제 오십대 중반이 되어 거울 앞으로 돌아왔다.

“무릎이 성할 때 걷자, 가슴이 두근거릴 때 떠나자!” 전날 친구들은 함께 구례에서 만나 약사유리광전이 유명한 사성암에 올랐다. 섬진강과 구례읍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사방이 탁 트인 기암절벽 끝에서 세워진 지리산에서 가장 멋진 전망대이었다.

사성암의 유리약사광전. 사진=박명기

다음날 노고단을 넘어 달궁계곡을 지나 뱀사골 계곡을 찾았다. ‘뱀사골 신선길’ 9km를 짓쳐 걸어 올라갔다.

뱀사골 이름은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었다는 전설에서 따왔다. 계곡이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길다. 반야봉을 끼고 내려온 봄 계곡은 수려했다. 선인대, 석실, 요룡대, 탁용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 등 발걸음을 뗄 때마다 절경을 이룬 명승지가 숨어 있다.

오십대 중반 용띠 동창생들은 이무기들이었다. 나름 각 분야에서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왔다. 용이든 이무기든 승천을 꿈꾸면서 살아왔다. 어느덧 눈앞에 바위가 용이 되려고 고개를 쳐든 바위 ‘요룡대’다. 여기를 지나니 와운 마을 입구 길가에 이무기 조형물이 설치해 있다.

뱀사골 계곡의 청자빛 물빛의 소. 사진=박명기

계곡 끝 와운 마을 맨 위 해발 800미터 위치에는 20미터의 소나무가 마을을 내려다본다. 천연기념물 제424호 천년송이다. 500살이 된 이 마을 수호신 소나무의 위용과 풍채가 당당하다.

뱀사골 계곡은 여름에 수량이 넘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산이 험준하고 바위들도 많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정취가 다르지만 변함없이 청자빛 물빛은 깊고 푸르다. 이어지는 계류와 소(沼)와 담을 보면서, 용이 되고 싶었던 청춘 시절 꿈을 엿보았다.

■ 우리의 삶은 고개를 넘는 일이라지!

우리의 삶은 고개를 넘는 일이다. 어느덧 기대감을 낮추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슬프다. 정도(正道)가 아닌 욕심이 크고 음모와 모략에 능해야 성공이 빠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친구는 암에 걸려 위를 3분의 2까지 잘라내는 수술을 하면서 지옥 입구까지 갔다 왔다. 바람 편으로 전해온 소식들 중에 어떤 친구는 벌써 퇴직을 해 이모작 농사를 시작했다. 이렇게 모두들 국민연금 받을 나이에 대비해 새 전쟁에 돌입했다.

뱀사골 유래를 설명하는 조형물. 사진=박명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설파한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이제야 알 것 같다. 흐흥, “지리산, 가장 아플 때 와라”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첩첩산중 지리산 산중의 계곡물 속에서 느낀 새삼스런 자각과 후회들. 모두 ‘인생 100세 시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백살까지 산다’고 하면서....다들 경계를 넘어 나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옛날, 구례 사람들이 화개장을 보러 다녔던 길/ 경상도와 전라도, 하동과 구례의 경계를 넘는다/...경계는 늘 새로운 긍정의 시작이다’

-이종성 시 <작은재>

■ ‘뱀사골에서 쓴 편지’ 쓴 고정희 시인 폭우 실족 ‘승천’했을까

이 길에서 문득 나에게 밀려오는 슬픔 하나. 1991년 6월 고정희 시인이 이 뱀사골에서 폭우를 만나 실족해 43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시 <뱀사골에서 쓴 편지>는 마치 용이 되어 승천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특히 마지막 문장 '승천합니다'는 뒷골이 서늘하다.

바위가 용이 되려고 고개를 쳐든 바위 ‘요룡대’. 사진=박명기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1 ―뱀사골에서 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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