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호씨와 친구 5명은 한 해의 마지막 모임을 종로의 한 연탄구이 고깃집에서 갖기로 했다. 요즘 유행한다는 70년대 레트로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아닌가. 가스불과 달리 천천히 타오르며 적당한 불맛을 주는 연탄구이는 고기의 참맛을 주기에 맛으로도 찾을만했고, 연탄을 주연료로 사용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추억과 호감도 남달랐다.친구들이 하나 둘, 떠들썩한 연탄구이 집으로 들어오는데 동식씨가 입구에서 머뭇거리는게 보였다. 처음에는 전화를 받나 했는데, 왠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식당 안을 보기만 할 뿐 들어오질
K시 N구 H아파트 114동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민들을 내려다보는 놈이 하나 있었다. 이름 하여 ‘슈퍼울투라 바이얼렛 감마나노 감지 CCTV’."요놈 봐라, 내가 뭔 잘못을 했길래 독수리눈으로 째려보는 거여?"Y씨(당 63세)는 장난삼아 주먹을 바투 쥐고 CCTV 안구 쪽을 꼬누며 쉐도우모션으로 몇 번 주먹질을 하였다. 그러자 ‘그놈’은 너 잘 만났다는 투로 혀를 날름거리며 Y씨의 온몸을 투명카메라로 찍어대는 것이었다. 필시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러 컷의 동영상
영순씨는 올해 초에 남편을 졸랐다.“여보, 양평 쪽에 여러 가구가 몇 이랑씩 텃밭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집단 텃밭이 있대요. 요즘 그런데 얻으려면 경쟁이 심해서 빨리 가서 신청해야 돼요. 올해 봄부터 채소를 심으려면 지금 현장을 확인하고 두 세 이랑 정도는 재배한다고 계약을 해야 돼요.”그런데도 공무원으로 퇴직한 남편 민국씨는 영 심드렁했다.“당신 정년퇴직하면 나랑 여행 다니고 텃밭 가꿀 시간이 난다는 기대에 남들이 싫다는 남편의 퇴직도 난 괜찮던데, 내 손으로 가꾼 싱싱한 상추쌈 먹을 생각하면 기분이
웨딩드레스 투어? 이게 무슨 말이야? 딸의 결혼식 날짜가 결정되자 여러 가지로 바빠진 민자씨에게 난데없는 단어가 들려왔다. 웨딩드레스 투어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웨딩드레스를 차려 입고 여행을 가는 게 웨딩드레스 투어인가? 하는데 딸애의 설명인즉슨 이랬다.“요즘엔 신부들이 자신의 분위기와 체형에 맞는 드레스를 선택하기 위해 웨딩드레스 샵(shop) 몇 군데에 가서 입어보고 1차로 자신의 분위기에 맞는 곳을 먼저 고르고 2차는 1차로 정한 그 샵에서 다시 디자인을 골라 몸에 맞게 수정해서 입어요.”“그
나는 날개를 접은 한 마리 매미다.젖 먹던 힘까지 다리에 실으며 입을 앙다물고 주문을 외듯 진지하게 읊조린다. 나는 전신을 나무 등걸에 밀착한 매미를 연상하며 최대한 암벽과 한 몸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암벽은 여태까지 지나온 암벽들과는 달리 밧줄이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발을 디딜 만한 간격으로 움푹움푹 홈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없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남편의 꽁무니만 쫓아 열심히 기어오른다. 남편도 나와 거의 똑같은 자세여서 나를 끌어올려줄 상황이 아니다. 일순간 비장감이 가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생 친구들끼리 모인 저녁식사 자리라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술맛도 나건만 민규씨는 왠지 좌불안석이다. 아직은 현역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는 60대 초반의 나이인지라 저녁모임의 시작시간도 7시였다. 민규씨는 1차만 끝내고 일어서도 집에 가면 9시가 넘는다는 생각이 뱅뱅 돌았다. 59세쯤 정년을 채우고 회사에서 은퇴해서 취미생활 말고는 재취업을 하지 않은 민규씨는 현역친구들과의 만남이 사회에 대한 감각을 유지시켜 주거나 추억을 불러들여서 좋았다. 특히 고등학교 동기생들이라면 가치관이 상당히 비슷해서 미묘한 정치나 경
나는 잠 잘 때마다 거의 매일 꿈을 꾸는 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입체적 꿈까지 꾸면서 꿈과 현실을 혼동하기도 한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물화(物化)를 얘기했지만, 나는 그저 꿈속의 이야기에 내재된 의미 파악에만 열을 올린다.어린 시절, 나는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신비한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지금도 물론 그런 꿈은 진행형이다. 나는 유난히 금성과 화성에 관심이 많다. 그 별들의 밝기나 빛깔 등의 과학적 사실은 뒷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을 관찰한다는 게 그저 큰 즐거움이
"피고는 자연 생태 도토리를 채취하는 것이 불법인지 몰랐습니까?""알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알았다/몰랐다로 짧게 말하세요!""몰랐습니다.""도토리를 왜 채취했습니까?""채취하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것을 몇 개 주웠을 뿐입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예욧? ""아니지요! 채취라 하면 도토리나무에 달린 열매에 물리력을 가하여 잡아 딴것을 말하고요, 저는 그럴 힘은 없습니다.""그건 그렇다 치고, 도토리를 무엇에 쓰려고 주웠습니까? 혹 그것으로 도토리묵을 만들어 불법으로 납품할 의도 아니었나요?""존경하는 판사님! 도토리 서너
선미씨는 죽은 여동생의 남편인 제부가 오랜만에 만나자고 전화를 해, 그러자고 약속을 정하면서부터 묘한 기류에 휩싸였다. 여동생은 3년간 자궁암 투병을 하다가 2년 전 인생 60살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00세 시대에 충분히 살지 못하고 떠나간 동생을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회한에 아직도 가끔 멍한 시간이 엄습해왔다. 선미씨는 삶의 덧없음과 더불어 인간관계의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했다.제부는 동생이 떠난 후 아직도 그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하나 있는 딸인 선미씨의 조카는 작년에 결혼한 터라 제부는 말 그대로 혼자
희숙씨는 올해 62세가 되었다. 하나뿐인 딸이 작년에 결혼을 하자 소위 ‘빈둥지증후군’이란 게 찾아왔다. 온통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감정에 집에 있어도 안정이 되질 않고 허무하고 몸도 아파왔다. 그동안 꽃길만 걸어온 삶은 아니었지만 험한 일은 하지 않고 교사 부인으로, 그 범위 내에서 나름 취미생활이며 운동도 하고 지내왔는데 왠일인지 몰랐다. 동갑이라 아직도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는 남편은 주말계획도 촘촘하게 짜서 친구들과 지내느라 바빴다. 희숙씨는 무너져가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평소에 헬스클럽
라일락 꽃잎이 날리던 날, 수학여행 버스가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떠나가는 뒷모습에는 아스라이 그리움 같은 것이 혹은 슬픔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버스가 교문 앞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 면소재지 삼거리를 돌아나가자 버스 옆구리에 새겨진 ‘청운(靑雲)관광’이라는 글자가 가물거렸다.남겨진 아이들은 남학생 두 명, 여학생 한 명, 이렇게 셋이었다. 한동안 어떤 미세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말(言)이 갑자기 길을 잃은 듯 교실에는 고요가 숨을 죽였다. 여자애는 복도 쪽 자기 자리에서 머리칼만 자꾸 앞쪽으로
주말을 맞아 부모님 댁을 찾은 경찬씨는 언제나 그렇듯 가라앉아 있는 집안 풍경에 마음이 무거워져 왔다. 경찬씨 자신도 60대 초반으로 곧 공식적으로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는 ‘지공거사’가 될 날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굳이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따로 살면서 90세 아버지와 85세의 어머니가 꾸려가는 집안풍경은 조용을 넘어 적막했다. 보건 안보건 켜져 있는 텔레비전 소리가 없다면 물 속 같을지도 몰랐다.다행히도 어머니는 다리와 허리가 그리 아프지 않아 아직도 집안 살림을 하지만 아버지는 노인성기억력장애의 끝이
굴지의 대학병원에서도 못 찾았으니 어떡한다? 까짓것 현해탄 건너 동경대, 그래도 안 되면 태평양 건너 가보는 거지 뭐.큰소리로 떠벌이는 남편의 얼굴은 조롱 섞인 웃음으로 터질 듯하다. 나도 질세라 히죽거리며 선뜻 답을 챙긴다.그냥 태평양 건너 하버드로 직행해요.나는 지난 열흘 동안 꼼짝없이 가시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녔다.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는 나는 그날 점심 메뉴로 생선회를 선택했다. 회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남편은 회 몇 점을 먹고는 바로 매운탕을 주문했다. 불판 위에서 맛깔스럽게 끓어오르는 매운탕. 화관처럼 피어오르는 고춧가루
홍범식(洪凡植)씨는 70여 평생동안 세상의 갖가지 '법칙'을 지켜오면서 살다보니 어느덧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홍범식은 편모슬하 소년가장이나 다름없었고 비록 공부는 잘하지 못했으나, 지각 결석 한 번 하지 않아 초등학교 75명 졸업생 중 유일하게 6년 개근상을 받았다. 그 부상으로 삼거리 면장으로부터 "賞"이라고 큼지막한 도장이 찍힌 두툼한 영어사전을 받았으나 중학 갈 형편이 되지 못해 영어사전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특이하게도 어린 범식이는 세상의 모든 규칙이란 규칙은 무조건 지키라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엄마 뱃속에서
현업에서 은퇴한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매주 점심 때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 있다. 윤호씨는 많은 모임 중에서 그 모임이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라 취향이 비슷해서 그런지 역시 마음이 제일 편했다. 등산, 여행 등의 취미생활을 주로 같이 하는 편인데 그날은 강남의 한 쇼핑몰에서 영화를 보고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햄버거는 왠지 젊은이들이 먹는 음식인 것 같고 간편하기도 해서 가끔 별식으로 먹었다. 은퇴자들이 젊은 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작은 배려 중에 한 가지로 그들이 빠듯한 시간 안에 점심을 먹는 12시부터 1시 사이에는 식당에
최여사는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남편인 문식씨의 입단속에 나섰다. 다른 집은 음식장만이니 청소니 가사노동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데 최여사는 일보다도 문식씨의 입이 더 걱정이었다. 요즘 정치인이나 정치평론가들의 유튜브에 푹 빠진 문식씨는 아주 정치학 박사에다가 아마추어 시사평론가 내지는 대단한 애국지사가 되어가고 있었다.“당신, 이번 추석에 애들이랑 모처럼 같이 밥 먹고 분위기 좋은데 괜히 요즘 정치 얘기 꺼내지 말아요. 그냥 그런 얘기는 당신이랑 거의 생각이 같은 친구들끼리 실컷 얘기하면서 해소하고 애들이랑은 하지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서정주의 시구가 떠오르는 가을이다. 하늘은 더없이 청명해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면서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아니 자질구레한 인생사가 훌쩍 떨어져나가면서 드넓은 바다 같은 심정이 된다. 가을은 역시 남성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해서 유목민인 내 남편이 펄펄 나는 계절이기도 하다.남편은 유목민의 근성을 주체하다 못해 서슴지 않고 정년을 앞당겼다. 유랑, 그것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일는지도 모른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가을 아침엔 청맹과니도 시인이 되겠다.FM의 아나운서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 한 구절을 낭송하며 이토록 청명한 가을 아침에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잠시 멍해진다. 그 애는 출소했을까.작년 이맘때쯤이었다. 교회에서 전도사가 내게 두툼한 편지를 내밀었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보낸 이의 주소는 경기도 안양의 사서함이었다. 사서함, 아들이 군대 갔을 때도 사서함으로 편지를 썼다. 누구지? 편지 봉투에는 분명히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편지 봉투가 너무 두툼해서 선뜻 열어볼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와서야
결혼한 아들이 며느리, 손녀와 함께 주말인 토요일 저녁에 정국씨 집으로 왔다. 깡총거리며 현관에 들어서는 3살난 손녀는 정말 사람꽃이라 할 만큼 귀엽기 그지없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온가족이 주말저녁에 밥을 같이 먹는데 가끔은 외식도 하지만 주로 정국씨의 집에서 아내가 마련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는 편이다.정국씨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식탁에 둘러앉은 아들 내외와 손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과 아내, 이렇게 모두 여섯 명의 식구들을 둘러보자 마음이 뿌듯해져 왔다. 아내 역시 식사를 준비하느라 힘들기는 해도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이
캐톡, 천복순여사는 손을 뻗어 머리맡의 휴대폰을 열어본다. 역시‘반딸’이다. 화면 가득히 분홍빛 배롱나무 꽃이 마중을 나온다. 화사하다.어르신, 우리 아파트 앞에 배롱나무 꽃이 피었어요. 참 예쁘지요? 이 무더위에 식사는 잘 하세요? 입맛 없으셔도 꼭 식사하시고 물도 많이 드셔야 해요. 고마운 사람이다. 지금 오는 요양보호사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어찌나 늙은이 마음을 잘 살피는지 요양보호센터장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답답하지? 언제나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직 서너 달은 지나야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