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눈앞에 둔 황창석(黃昌石) 노인은 정년규정도 없는 조그만 인쇄소를 그만두고 하루 쉬고 하루 노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는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다 말고 불현듯 고추장회사에 전화를 걸었다.거그 우창고추장 회사 맞지요?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큰 회사가 그러시면 안 되지라잉!고객님, 저희 제품에 무슨 하자라도 있나요?아니 고것이 아니고, 방금도 우창고추장에 비벼 묵으니께 밥맛이 참말로 좋습디다.아 그래요. 그 말씀 하시려고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저희 제품을 애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감사하고 말고는
그날도 남편은 외출을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미숙씨는 연일 계속되는 코로나발 남편의 집콕 때문에 전신이 집에 옭아매어져 있는 듯 자유롭지가 못했다. 그나마 미숙씨는 장을 본다며 마스크를 끼고 동네 마트라도 다녀오곤 했는데 남편은 아예 집밖엔 온통 바이러스로 칠갑이라도 돼있는 듯 겁을 내며 집안에 똬리를 틀었다. 장기전에 대비해 거실의 탁자를 한편으로 치우고 요가매트를 깔고 아령까지 비치해 두었다.스마트폰 유투브, 텔레비전 뉴스, 신문 등과 벗을 삼아 잘도 지냈다. 미숙씨는 저 소심한 사람이 젊었을 때는 활기차게 중동현장을 누비던 건
남다른 춘삼월, 춘삼월이 저만치 거리를 두고 떠나간다. 이번에 특별히 고안한 지침대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묵묵히 떠난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연과 사람과의 거리두기로까지 확대되었다. 나도 일찌감치 기품 서린 산수유는 물론, 고아한 향기까지 품은 매화와도 악수를 포기했다. 참 맥이 빠지고 서러운 나날이다.집 안의 짧은 동선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성이는데, 문득 의심의 기운이 뻗친다. 누군가에게 눈딱총을 놓듯 눈에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뭡니까? 정말 실제 상황 맞아요? 행여 가상의 세계에서 괜히
왜 하필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두루마리 휴지일까? 민자씨는 텔레비전으로 코로나 관련뉴스를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소위 선진국들에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일반 국민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 사재기 광풍이라며 각국 마트의 텅 빈 휴지 매대를 연신 보여주었다.이 현상에 대한 이론은 분분했다. 일단은 심리적인 이유로, 불안정한 시절에 집에만 있으려니 집안에 썩지도 않으면서 부피가 큰 휴지더미를 쌓아놓으면 무언가 준비를 해놓았다는 안정감을 준다는 설, 현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최소한
김종훈씨는 요즘 전 세계를 흔들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심기가 잔뜩 불편하고 불안했다. 전염성이 강하다니 예방 차원에서 어느 정도 삶이 불편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를 볼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만, 68세인 김종훈씨가 겪는 어려움은 또 달랐다.처음에 받은 쇼크는 텔레비전 화면 하단에 임산부, 65세이상 고령자, 기저질환 보유자 등 고위험군은 외출을 철저히 삼가라는 경고성 글자가 계속 나오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김종훈씨는 말 그대로 ‘집콕’을 하면서 하루 종일 스마트폰의 뉴스와 텔레비전의
미순, 희순, 순남 이 이름들이 두 살 터울로 모두 60대인 순남씨 여자형제들의 이름이고, 막내 남동생의 이름은 수찬이다. 딸 셋에 막내로 아들 하나~이름만 봐도 집안 내력이 나오고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중·노년세대 형제의 구성이다. 막내인 순남씨는 사내동생을 봐야 한다는 부모의 염원으로 이름에 남자가 들어갔다.지금 88세인 어머니의 막내아들 편애는 평생 시들지도 않고 지칠 줄도 몰랐다. 순남씨는 그 아들이 과연 어머니에게 무슨 특별한 즐거움과 사랑을 주는지 일평생 관찰을 해봐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머니는 옛
겨울이 흐지부지 가고 있다. 제대로 맹위 한 번 떨치지 못하고 어깨만 실없이 들썩이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낼모레니 겨울은 이미 가고 봄이 왔다고 해야 옳겠다. 하지만 체감 온도는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다. 문득 씁쓸한 기운이 온몸에 번진다. 조석지변도 유분수라더니, 지금 내 정신세계가 요동을 치고 있다. 엊그제는 온난화 기온에 쌍심지를 키며 덤벼들다가 오늘은 어서 빨리 따뜻한, 아니 뜨거운 봄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다. ‘신종코로나19’ 탓이다.일단 꽁꽁 얼어
경순씨는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영어 학습지를 들고 냉큼 식탁에 앉았다. 벌써 9시라 선생님이 올 시간이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경순씨는 어젯밤에 외우다가 그만 잠들어버려 다 외우지 못한 단어들을 밑줄을 쳐가며 외우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에는 식품과 음식 단어들을 배웠고, 오늘은 거리의 간판에 흔히 쓰이는 단어들을 배울 차례였다.경순씨는 석 달 전부터 1주일에 한 차례씩 방문해서 영어를 가르치는 성인 대상 영어학습지 공부를 시작했다. 경순씨의 오랜 부끄러움이자 숨겨둔 열망인 영어습득의 기회를 마련해준 건 결혼해서 근처에 살고 있는
지난 설날 며칠 전부터 정금자씨에게 장바구니 금단증상이 나타났다. 수십년간 지내던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된지 3년이 지났지만 제사준비 장보기가 아니고 가족들이 설날 먹을 음식만 조금 장만하면 된다는 게 영 실감이 나질 않아 뭐를 안 샀나 하고 장바구니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40년 가까운 결혼 생활 동안 늘 명절은 우스개소리처럼 ‘노동절’에 가까웠다. 결혼 이후 계속 지내온 시아버지의 제사는 3년 전부터 간단한 명절 차례로 대체되었다. 그 3년 전이라는 시점은 금자씨의 아들이 결혼을 한 바로 그 해이고, 치매를 앓
이 계절이 겨울인가? 계절을 망각할 정도로 매일 매일이 포근한데, 오늘 오후는 유난히 더 햇살이 다사롭다. 나는 얇은 패딩 차림을 하고 용마산 데크길로 향한다.사가정공원에서부터 망우산에 이르는 데크길은 우리 동네의 명소다. 작년 3월 개장한 이래 사랑하는 산책로 1호로 내 가슴속에 등재되었다. 일단 이 길은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등산로에 비해 친절한 지그재그 형태가 재미있고, 발바닥에 올라오는 판판한 나무의 감촉도 좋다. 카펫처럼 보드랍지 않는데도 왠지 카펫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뿐인가. 더불어 휠체어 바퀴도 마음껏 굴러가고,
아들과 며느리가 지난 주말에 집에 다녀간 이후, 지금까지 1주일간 최근식씨 부부는 깊다면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날은 집에 들어설 때부터 아들내외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집에서 불고기와 야채쌈으로 다함께 맛있게 저녁밥을 먹었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인 손자는 한창 성장기라서 그런지 상추에 양념장까지 얹어서 불고기를 야무지게 먹어서 언제 이렇게 컸는가 싶어 흐뭇하기만 했다. 최근식씨 내외에게는 첫손주로 그 애가 준 삶의 경이와 잔재미는 사람들이 흔히 손주를 일컬어 ‘노년의 꽃’이라고 말하는 이
소판돈씨(67세)는 77년도 한정판으로 발행된 10원짜리 동전이 100만원을 호가한다는 뉴스를 접한 후,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고 꽁무니에 성냥불이라도 붙은 망아지처럼 허둥댔다.그날도 동사무소 주민센터 노인스포츠댄스 무료강습회에서 사귄 연상의 홍싸리(洪舍利) 여사와의 약속도 까맣게 잊어먹고 동전을 찾느라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소판돈씨는 본래 여린 심성을 타고나 시골에 살 때도 달구새끼(병아리) 한 마리 제 손으로 잡지 못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돈의 망령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제 정신이 아니었
윤호씨는 이른 아침에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가져와 식탁 위에 놓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퇴직 전에는 대충 신문의 큰글씨만 훑어보고 출근하기 바빴지만 지금은 오전에 시간이 많아서 신문을 마음껏 다 읽을 수 있었다. 아주 할 일이 없는 처지는 아니고, 오전 11시쯤에는 집을 나간다. 친한 친구가 운영하는 국밥집에서 가장 손님이 많이 몰리는 점심시간에 카운터를 봐주고 있어 하루 일과가 나름 정해져 있는 편이다.윤호씨에겐 부인이 아침밥을 차리는 동안 신문을 펼쳐 들고 읽는 그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아침의 이 평온이 언제까지나 계
영월 창령사터의 오백나한이 서울 나들이를 왔다. 오래 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됐기에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미 지난해 춘천 국립박물관 특별전에서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자로, 성과 속의 경계에 머물면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인간이다. 즉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위대한 성자의 모습을 지닌 인간이 나한이다. 에서는 부처 입멸 뒤에 부처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가섭을 비롯한 500명의 제
이 얼마나 기다리던 부부 해외여행이던가! 윤자씨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한 남편 경식씨와 패키지로 중국의 상해, 항주, 소주를 여행하기로 했다. 남편의 친구 부부 4쌍이 같이 가니까 총 8명이었다. 앞으로 해외여행을 자주 하자며 팀웍이 어떤지 시험 삼아 가까운 중국여행으로 시작하기로 했다.전업주부로 살아온 윤자씨는 마침 하나뿐인 아들이 작년에 결혼을 한 터라 ‘연금남’인 남편과 오붓하게 중노년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경식씨는 성격이 꽤나 다감하고 세심해서 퇴직 전에도 쓰레기 분리수
“눈 부셔요? 그만 들어갈래요?”“아녀, 기냥 조금 더 있자.”꽃샘바람이 사나웠지만 햇살은 화사 했다.“좀 앉을래요?”“아녀, 서 있을 만혀.”삼촌은 중심을 잡지 못해서 거반 내게 기대어 서있으면서도 앉으려 들지를 않았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삼촌을 부축했다. 예전 같으면 삼촌의 등 뒤에서 와락 껴안고도 부족해서 삼촌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을 터였다. 어쩌다가 삼촌과 이리도 서먹해졌는지 모르겠다.“그만 들어가요. 나는 추
퇴근 시간, 서울특별시 어느 시내버스 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예의 퇴근길 시내버스 안은 매우 붐볐다. 그때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귀밑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자(A씨, 당 53세)가 미아리고개에서 꾸부정한 자세로 허겁지겁 승차한다.승객 A : (시내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로) 아~따, 징허게 춥네잉.A씨는 시내버스 안을 살피다가 버스 뒤쪽으로 삐직삐직 파고들기 시작했다. A씨는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볼멘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드디어 맨 뒷좌석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맨 뒷좌석에는 모두 다섯 명이 착석하고
깊은 밤입니다. 커튼을 길게 내린 하루가 문마저 닫으려는 이 시간, 벌써 잠자리에 든 건 아니신지요. 저는 아직 말똥말똥합니다. 저는 요즘 잠자리를 회피하는 데에, 아니 잠자리에 반항하는 데에 부쩍 재미가 붙었습니다. 엊그제 둥근 보름달을 눈에 담은 후유증인 것도 같은데, 모를 일입니다. 꽉 찬 달과 마주하면서 왜 저는 뜬금없이 텅 빈 제 가슴을 보았을까요. 그때처럼 고적감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아무래도 오늘밤, 선배를 붙들고 소소한 얘기라도 조잘거려야 할까 봅니다. 해가 노니는 낮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커피부터 대령해놓고 눈을 마주
윤자씨네 집에 86세의 시어머니가 오셨다. 겨울이 되자 추운 시골집에 계시는 것보다 따뜻한 아파트가 지내기 낫다며 아들, 즉 윤자씨의 남편이 모시고 왔다. 60살이 넘자 윤자씨도 이젠 그 불편하던 시어머니가 임의롭고, 그냥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노환으로 몸이 불편한 여인, 그래서 돌봐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자동차 부품 제조업을 하면서 제법 사업을 잘 꾸려가는 남편 덕에 윤자씨는 돈걱정을 크게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요즘이 좋았다. 큰딸이 결혼을 해서 마침 빈 방도 있는 터라 시어머니가 한겨울 동안 와 계신다고 해도 그리 불편할
엄마! 내 가슴까지 찢을 듯이 애절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나는 찬송가를 부르다가 멈칫했다. 우리 일행은 좁다란 복도에 옹색하게 서서 영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80세를 넘긴 고인에 대한 애도는 형식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고인과는 영정사진이 첫 대면이었다.단출한 유가족의 뒤를 따라서 장의차에 오를 때만 해도 그리 울적한 마음이 아니었다. 내 장례식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의 몇 장을 꼭 불러달라는 둥 해가면서 여유까지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니 하루 온종일, 엄마를 부르던 애끓는 목소리가 내